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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술잔
- URL: https://tonggwa.life/suljan/
- Published: 2026-09-20T23:00:55.000Z
- Updated: 2026-09-20T23:00:54.000Z
- Description: 오래된 지인의 부탁으로 사업제안서를 만들었지만, 관계와 일의 값이 뒤섞인 자리에서 한 잔의 술을 떠올립니다.
- Author: 올곧 이정
- Tags: 에세이, 관계, 경계, 알아차림

오랜만에 반가운 지인이 찾아왔습니다.

다른 회사에서 자신의 사업에 관심을 보이고 있으니, 그 회사에 제안할 사업 제안서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한동안 문서 작업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무서웠습니다.

다시 모니터 앞에서 보낼 시간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졌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거절했습니다.

지인은 물러나지 않고 이번 제휴가 자신에게 왜 중요한지를 쉼 없이 설명했습니다.  
듣는 동안 한숨이 나왔습니다. 등줄기가 묵직해지며 굳어갔습니다.

비용을 이야기하면 포기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많은 경우 그랬습니다.

단가를 계산해 금액을 말했습니다. 사업이 되든 안 되든 정해진 금액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쪽 회사의 위험을 내가 안고 싶지는 않다고 말했습니다.

“비싸네요.”

나는 그 예산에 맞춰줄 수 있는 업체를 찾아보라고 고개를 저으며 말했습니다. 필요하면 업체를 소개해 주겠다고도 했습니다.

지인은 소파 맞은편에 앉아 두 손을 깍지 낀 채 한참을 고개 숙이고 있었습니다.

지인은 이번만큼은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라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비용은 감당하겠다고 했습니다.

나 역시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침묵이 지나갔습니다.

가슴이 짓눌리고 등이 딱딱하게 굳어 왔습니다.

하지 마라. 온몸의 신경이 그렇게 경고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비워냈던 수많은 밤의 술잔들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힘든 시간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계약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오래된 사이에 계약서를 쓰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자료를 건네받고, 일주일 내내 밤늦게까지 문서를 만들었습니다. 약속한 날짜에 맞춰 사업제안서를 넘겼습니다. 지인은 흡족해했고 몇 번이나 고맙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 회사를 설득하러 갔습니다.

2주쯤 지나 연락이 왔습니다. 그 회사와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는 짧은 통보였습니다.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모르겠다고만 했습니다. 그리고 연락이 없었습니다. 상심이 커서 마음을 추스르고 있겠거니 생각하고 얼마간 기다렸습니다.

결국 먼저 전화를 걸어 정산 이야기를 꺼낸 건 나였습니다.

그는 일이 틀어졌으니, 비용을 깎아달라고 했습니다. 자기 처지도 헤아려 달라고 했습니다.  
사업의 성사 여부와 관계없이 정해진 금액을 받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차분하게 되물었습니다.

“요즘 다 AI 돌리던데요. 이전보다 손쉽게 만들었을 텐데 좀 과한 것 같아요.”

그 한마디에 나는 말을 잃었습니다. 그는 다음 주에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했습니다. 부탁할 때는 나를 찾아왔던 사람이 이번에는 나더러 오라고 했습니다.

나는 갔습니다.

마주 앉은 그의 얼굴은 거칠어져 있었습니다. 그는 이미 많은 말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가 내민 깎인 금액에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섰습니다. 나는 그 사람과의 인연을 그 가격에 처분하기로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가슴이 다시 답답해졌습니다.

그때도 이랬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비워냈던 술잔들을 떠올리며 알겠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술을 마시지 않습니다.